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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을 만들기로 했다
알고 있는 내용을 면접장에서 꺼내지 못하는 문제에서 시작된 테일빌런의 출발점
면접이 다가오면 항상 같은 일이 반복됐다. 노션을 열면 분산 시스템 설계, 캐시 일관성 전략, 데이터베이스 트랜잭션 격리 레벨을 정리한 노트가 수십 페이지씩 쌓여 있었다. 공부할 때는 이해했고 직접 구현도 해봤는데, 막상 면접에서 “분산 환경에서 일관성 문제는 어떻게 다루셨어요?” 같은 질문을 만나면 12년치 경험이 갑자기 안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험해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꺼내지 못하는 거였다.
에빙하우스 망각곡선이라는 게 있다. 배운 내용의 절반은 하루 만에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나면 거의 남지 않는다. 이를 막으려면 적절한 시점에 다시 꺼내야 하는데, 뇌가 “이건 자주 쓰이는 정보구나”라고 판단해야 장기 기억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적절한 시점”을 사람이 직접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오늘 뭘 복습해야 하는지, 어느 주제가 위험한지를 스프레드시트로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사람은 드물어서 지식은 노트에 쌓이고, 읽을 때는 단단해 보이다가 압박 앞에서 증발한다.
이게 의지 문제가 아니라는 건 뇌과학이 설명하는데, 압박 상황에서는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기억을 꺼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억제된다. 예일대학교 신경과학자 에이미 아른스텐의 연구에 따르면 통제 불가능한 스트레스는 전두엽의 인지 능력을 빠르고 극적으로 저하시키며, 분명히 아는 내용도 압박 앞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 뇌가 생존 모드로 전환되는 기전이다.
도구도 찾아봤다. 이미 많이 사용하는 범용 LLM(ChatGPT, Claude, Gemini 등)부터 해외 모의면접 플랫폼, 플래시카드, Spaced Repetition App(복습 앱)까지 살펴봤지만 각각 조금씩 아쉬운 지점이 있었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이걸 만들다 보니, 기억 유지를 넘어서 더 중요한 부분이 드러났다.
노트를 읽으면 단어가 익숙하고 개념이 명확해 보여서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수동적 인식이다. 하지만 면접은 인식 대신 인출을 테스트하며, 보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지, 당황하지 않고 방어할 수 있는지, 꼬리 질문이 첫 답변의 허점을 건드릴 때도 논리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과 압박 아래서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대부분의 면접 준비는 거기서 실패한다.
필요한 건 더 스마트한 플래시카드 시스템 보다는 나와 체계적으로 논쟁해줄 무언가였다.
빌런은 거기서 나왔다.
면접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은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 때가 아니다. 안다고 생각해서 자신 있게 답했는데 면접관의 표정이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아까는 A라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하신 건 B처럼 들리네요. 어느 쪽이 맞죠?”라는 꼬리 질문이 답변의 얕은 부분을 드러낼 때다.
그 압박이 진짜 실력을 드러내며, 여기에 내성을 기르려면 평소에도 제한된 상황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표면적인 답변을 받아주지 않는 AI 면접관을 만들었다. 꼬리 질문을 던지고 이전 컨텍스트를 기억하며, 모순을 잡아내면 왜냐고 묻고 또 묻는다.
첫 번째 페르소나는 꼬리질문 빌런을 줄인 꼬빌이다. 냉혹하고 정확해서 허풍이 통하지 않으며, 답하는 도중에 자신이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걸 깨닫게 만드는 종류의 면접관이다.
ChatGPT나 Claude, Gemini 등을 활용하면 안 되냐는 질문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능은 하고 프롬프트를 잘 넣어주면 구체적인 상황과 역할에 맞춰 연습할 수 있지만 매번 셋업이 번거롭고 결국 컨텍스트가 유실되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예전에 내가 어디서 막혔는지 추적하게 하려면 메모리에 매번 기억시켜야 하는데, LLM은 비결정적이라 정작 필요할 때 꺼내준다는 보장이 없고 제공되는 메모리도 한정적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또 귀찮다.
테일빌런은 도구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세션마다 데이터가 쌓이면서 약한 지점이 드러나고 그 결과가 다음 세션에 반영되며,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둔 덕분에 음성 면접이나 피드백 리포트, 타겟 기업별 모드처럼 필요한 기능도 계속 붙여나갈 수 있다.
ChatGPT는 매번 새로 시작하지만, 테일빌런은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구조화하여 기억하는 방향으로 구현되었다.
처음에는 개발자 위주로 만들었다. 나 자신도 개발자라서 내가 가장 잘 아는 문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만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아는 것과 압박 아래서 그것을 설명하고 방어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해관계자에게 작업물을 발표하는 디자이너, 로드맵 결정을 설명하는 기획자, 고객을 설득하는 영업처럼 약점을 찾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증명해야 하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을 겪는다.
빌런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반박하고 더 깊이 파고들면서 약한 답변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지속적으로 당신을 채찍질 하고 담금질 시킨다.
테일빌런(Tail Villain)은 2026년 5월에 tailvillain.com으로 베타 런칭했고, 이 시리즈는 그 과정을 기록한다.
작동하지 않았던 설계, 다시 써야 했던 LLM 프롬프트, evaluation을 통한 개선과 다양한 엣지 케이스처럼 직접 0 to 1으로 만들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 그게 희미해지기 전에 남겨두기로 했다.